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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입문 상권 • 성경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

성경의 세계가 모든 문화권을 포함하고 성경의 메시지가 모든 문화권에 열려 잇다는 사실은 여러 문화권, 특히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가 서로 존중하고 협력해야 함을 말한다.(31쪽)
성경의 모든 본문은 창세기 첫 장부터 묵시록 끝 장까지 사람의 손으로 쓰였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믿음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랜 세월을 두고 성경을 만들어 냈다.(33~34쪽)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이제 이런 전통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고곻학과 고문서학 발달로 성경의 세계를 당대의 문화와 역사에 비추어 연구하고 성경 본문을 고대 근동의 문헌들과 비교함으로써, 성경의 다양한 문학양식과 성경 자료들의 편집 작업을 밝혀 낼 수 잇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성경 본문의 상당 부분이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두기보다 저자들의 문학적 소양과 신학적 반성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인하였다.(34쪽)
우리가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는 목적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에 더 깊이 접근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비상식적이고 비인도적 결론을 내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성경 독서는 성경을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인륜을 거슬러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광신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나, 율법을 현실에 적용하면서 그 근본 취지 보다는 시행세칙에 매달리는 율법주의Legalism의 오류에서 우리를 지켜준다.(34~35쪽)
성경은 하느님께 영감을 받은 인간이 하느님 영의 주도로 인간 역사 안에 드러나게 된 그분의 말씀과 위업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성경 본문의 뜻과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개인이나 공동체의 삶에 연결시켜 실천하기 위해서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36쪽)
성경 본문은 세 가지 기본 요소를 끌어안는다. 첫째 요소는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의 옛 신앙인들이 정치•문화•경제•사회의 맥락 안에서 엮어낸 삶이고, 둘째 요소는 주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며, 셋째 요소는 그들을 찾아온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 세 요소와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읽어 내고 거기에서 얻은 메시지를 우리 삶에 적용시키는 일이 바로 성경 공부의 본 목적이다.(38쪽)
성경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자라났고, 그 삶은 기원전 19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 이천여 년 동안 팔레스티나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 말씀이 자라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한다.(44쪽)
히브리 민족의 선민의식은 그들의 신체적 힘이나 정신적 우수성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약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야훼 신앙으로 뭉친 그들은 외부로는 타민족의 침입을 받고 끊임없이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며 자구책을 마련하는데 급급하면서도, 내부로는 그 옛날 이집트에서 천민으로 행세하던 자신들을 해방시키신 야훼 하느님을 민족의 진정한 통치권자로 모시면서 민족의 자존과 긍지를 지켜 나갔다.
한마디로 히브리인들의 선민의식은 덧없는 세상의 권력보다 역사의 원주인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도 적극적으로 매다리고자 했던 신앙인들의 유산이다. 이들의 신앙은 보잘것없는 유목민들과 히브리 노예들의 후손들을 강력한 공동체로 발전시켜 고대의 열강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동안 장구한 인고의 세월을 겪어 내고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게 하였다.(62쪽)
샬롬은 전쟁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물질과 정신과 마음이 안정을 누리는 상태를 말하였다. 나중에 샬롬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는 일치와 조화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최종 구원으로 그 뜻이 발전한다.(76쪽)
기후와 계절의 변화는 고대인들에게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지금처럼 자연 현상을 예측하여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이스라엘인들은 자연이 주는 혜택과 재앙을 하느님의 상선벌악으로 받아들였다. 기후와 계절의 법칙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고 조그마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 파괴하거나 자연을 신격화하는 범신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자연 안에서 우리에게 접근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들에게 자연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돕는 다리인 셈이다.(82쪽)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하신 것처럼 한 주간에 엿새를 창조를 완성하는 일에 투자하되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118쪽)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쉬어야 한다. 이렛날에 충분히 쉬어야 다음 엿새 동안 또다시 창조 사업을 완성해 나갈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118~119쪽)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자신을 위해서 이집트에서 빼내셨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된 이들은 이제 하느님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동료 이스라엘을 개인 소유로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비싼 값으로 사서 당신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유로움 종들'은 서로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된다.(126~127쪽)
구약의 지혜문학이 밝힌 바와 같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참다운 우정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그분의 선물이며, 신약 시대에 와서 우정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가장 순수하고 충실한 우정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유대관계 안에서 꽃을 피웠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듣고 실천하며, 함께 모여 빵을 나누고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바치는 가운데 우리의 우정은 자연스럽게 성숙하고 돈독해지다는 뜻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적 우정의 실천은 궁핍한 이웃 형제자매들과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두드러진다.(164쪽)
전쟁은 결코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평화를 누리고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이사 7,1-14; 예레 21,3-10; 34,1-5; 호세 10,12 이하 등).(181쪽)
그러나 죄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내적 자세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1사무 15,22~23' 시편 40,6-8).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제물은 겸손하게 뉘우치는 마음으로 바치는 의로운 제물이다(시편 50,19-23).
짐승의 목숨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십자가 위에서의 수난과 죽음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완전한 제사다.(211쪽)
우리는 위에서 시나이 계약이 고대 근동의 주종 조약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혔는데, 실제 역사에서 종주국 임금은 계약을 위반한 종속국 임금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것이 상식이고 관례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 주종 조약의 틀을 이용하시지만 종주국 임금처럼 행세하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그분은 자주 당신 자신을, 자녀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시는 아버지나 어머니로, 정상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충실한 남편으로 드러내신다. 그분은 불충한 자녀들이나 아내를 징벌하시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징벌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잠정적 징벌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로 온 인류와 맺으신 계약은 구약의 모든 계약을 수렴하고 완성한다.(222~223쪽)
특정한 짐승들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레위 11장; 신명 14,3-21) 단순히 미관상이나 위생상의 이유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상 숭배나 인간을 위협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들과 관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돼지는 고대 가나안인들이 제물로 바치던 짐승이고, 이집트에서는 지하 세계의 신들과 접촉할 수 있는 존재였다. 낙타는 고대 아랍인들의 주요 제물이자 신성한 집승이고, 이집트인들에게는 신적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개는 이집트, 이란, 북부 시리아에서 신성시되었고, 히타이트에서는 신들이 개 위에 서 있다. 이사 66,17을 보면 쥐도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인데, 실제로 하란에서는 생쥐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토끼의 대가리와 발톱은 오늘날까지도 아랍인들 사이에서 부적으로 통하고, 아라비아에서는 올빼미를 죽은 자가 육화한 짐승으로 여겨 공경한다. 이 밖에도 많은 짐승들이 고대 근동에서 제물로 바쳐지거나 신성시되었다. 부정한 짐승들은 제물로 사용해서도 안 되고(창세 8,20), 맏물 봉헌이나(레위 27,26; 민수 18,15)) 십일조로 바쳐서도 안 된다(레위 27,32).(231쪽)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가 비판한 것은, 율법의 시행세칙에 매달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거나 일부러 지나치는 '율법주의'였다. 예수님은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사랑의 두 가지 중대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밝혀 주셨다(루카 10,25-28).
그러나 율법을 동양 사상의 도道와 연관시켜 생각하면 이런 의무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하느님께 가는 길이요 가르침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도리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도를 닦고 안 닦고는 형법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도를 훌륭하게 닦는 사람은 올바른 인간이 되고,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까지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율법을 단순히 윤리 도덕의 지침과 규정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인간이 마땅히 닦아야 할 덕이요 지켜야 할 도리로 이해한다면, 형식적이고 경직된 율법주의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237쪽)
그러나 영혼과 몸은 서로 분리시켜 이야기할 수 없다. 영혼은 몸의 영혼이고, 몸은 영혼의 몸이다.(246쪽)
구약의 시간 개념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묶어 하느님의 결정적인 때, 곧 마지막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주도하시는 분은 물론 '세기의 임금'이신 하느님이시다(1티모 1,17).(253쪽)
창세기 저자에 따르면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걸은 사람이다. 여기서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표현은 그분의 뜻과 계획을 헤아리고 존중하며 의롭고 착하게 살았다는 뜻이다. 365는 일 년의 날수와 같은 완벽한 숫자다. 에녹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 덕분에 완벽한 지상 생애를 마치고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느님께로 올라갔다.(254쪽)
성경에서 이상의 숫자들은 흔히, 하느님께서 우주 질서를 완벽하게 유지하실 뿐 아니라, 인간 역사의 질서까지도 가지런하게 주재하시고 지혜롭게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재천명하기 위하여 사용된다,(255쪽)
이상 세 예에서 본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기보다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오류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258쪽)
이 숫자 역시 상징적이다. 144,000은 이스라엘의 지파수 12를 두 번 곱하고 여기에 고대 이스라엘 군대의 한 부대 단위인 1,000을 곱하여 얻은 숫자로서 이스라엘의 충만함을 가리킨다. 144,00 = 12 × 12 × 1,000을 약간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처음 12는 이스라엘의 지파수, 두번째 12는 열두 사도단, 그리고 1,000은 하느님께 속한 무한한 숫자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떻든 두 경우 다 144,000이라는 숫자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숫자를 근거로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를 144,000명만으로 제한하려는 시도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이 숫자는 하느님의 구원에 초대된 이들이 무척 많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묵시 7,9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 말고도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언급한다. 또 묵시록과 같은 계열의 저서, 요한 복음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258쪽)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풀어 놓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기록으로서의 여가를 먼저 대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건과 기록을 따로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그 사건의 의미를 밝혀 후세에 전달하기 위하여 기록하였으므로 성경의 기록에는 언제나 사건을 내포하고 있음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오늘의 현실 안에서 되새기기 위해 필요하다. 현대인들과 달리 고대인들은 역사의 첫째 기능을, 사건의 사실fact을 확인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으로 여기기 않았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또는 그 일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에게 역사는 사건의 참뜻, 곧 사건의 진실truth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진실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서 사실을 다소 과장하거나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 점은 성경 저자들도 예외가 아니다.(312쪽)
성조설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성조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 시키시려고 자신들을 선택하고 방문하시어 복된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 충실한 삶으로 응답하였다. 성조 아브라함은 안정적 삶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순레의 길에 나섰으며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그분의 명령에도 주저함 없이 따르는 믿음을 보였다.
성조 이야기의 일관된 주제는 하느님께서 순례의 길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친절하게 이끄셨다는 것이다. 선조들은 인간적인 점과 잘못 때문에 자칫 안주나 방황에 떨어질 수 있었으나,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의롭고 용기 있게 처신하는 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셨다. 이리하여 성조 이야기는 그 세부 사항들의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밝힌다는 본디 의도를 뛰어넘어 온 인류에게 하느님을 향한 순례 여정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면서 구세사의 초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331쪽)
아마도 480년은, 거룩하고 완전한 숫자인 40을 한 세대로 보고 여기에 열두 세대를 뜻하는 다른 완전한 숫자 12를 곱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숫자일 가능성이 높다.(337쪽)
어떻든 1사무 17장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작고 보잘것 없는 한 인간이 하느님의 크신 능력을 믿으면서 자기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 준다.(380쪽)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앞서 나가지도 않고 하느님보다 뒤처지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하며 걷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진실과 정의를 실천하며 언제나 정직한 마음으로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383쪽)
주님께서는 그 작은 침묵의 소리 가운데에 계셨다.
폭풍과 지진과 불은 하느님 편에서 볼 때 파괴적인 행동을 알리는 것이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는 주님의 구원 행위와 연관된다. 주님께서는 폭풍움만을 관장하는 바알과 달리, 가장 작고 연약한 바람을 이용해서도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400쪽)
열왕기의 엘리야 이야기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 지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어떻게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소명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잘 가르쳐 준다.(401쪽)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사에서 이집트 탈출 못지않게 중요한 사건이다. 예루살렘 함락과 유배살이로 이스라엘은 민족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창조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새롭게 인식하였다. 또한 유배는 선민 이스라엘에게 민족주의적 선민의식에서 벗어나 구원의 보편주의에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배에서의 귀환과 회복을 예레미야는 제2의 이집트 탈출로 보았다.(430쪽)
유배 시절은 문필 활동이 활발했던 때다. 새로운 법전이 출간되었고 옛 문헌들이 수정•보완되었다. 이 시기 편집 활동을 벌인 문필가들은 주로 사제계급 출신이다.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들의 사제적 열정이 귀향길에 선 유다 포로민들을 끌어 모으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기의 신명기계 역사가들의 문필 활동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신명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의 편집뿐 아니라 신명기계 역사서(여호수아기에서 열왕기 하권까지)와 예레미야서 등의 편집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441쪽)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 문화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사업으로 지중해 연안과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퍼져 나가 다양한 지역 문화/종교와 만나 이루어진 일종의 혼합주의 문화를 가리킨다. 따라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 본토에 뿌리를 둔 순수한 그리스 문화와 어느 정도 구별된다.
헬라 문화와 히브리적 믿음은 쉽사리 융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대결과 갈등은 처음부터 예견되고 피할 수 없었다. 구약성경 가운데 마카베오기 상권과 하권이 이를 다루고 있다.(458쪽)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칙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서로마의 황제가 되기 바로 전 해인 311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반포하였다.(5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