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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의 상상력

만성질환자의 몸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계속 변하는 몸의 상태에 매번 다른 이름을 붙이는 일은 나름의 재미가 있기도 했으나, 어딘가 허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주로 증상을 토대로 모호하게 붙인 그 이름에 내가 구속되는 것 같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는 내가 나의 몸을 의심하기에, 내 몸의 경험을 그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나의 바깥의 어떤 집단에 속함으로써 나를 입증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설명할 때, 내가 굳이 선택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꼭 뱉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만성질환자라는 표현도 고민이 많다.(32쪽)
내 몸이 나를 계속 배신하고, 내 통제 바깥에 있고, 내 의지를 벗어나는 순간들에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통증을 느끼는 순간은 그것이 좋든 싫든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내가 나의 몸에게 배신당하고, 나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도, 나에게는 내가 여전히 몸을 느끼며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표일 수도 있다.(33쪽)
몸의 상실은 나의 상실로 다가왔다.
상실은 진단받던 날에 끝나지 않았다. 상실은 여전히 내 몸을 맴돈다. 상실은 '점'이 아니라 '선'이었다.(40쪽)
도대체 나는 장애인인가 비장애인인가, 그 사이에 뭔가가 있는가, 왜 나는 계속해서 입증되어야 하는가. 질병이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 있다면, 질병은 뭐 절반만큼 장애고 절반만큼 비장애인가.(67쪽)
소속되지 않아도 되는 삶, 살 만한 경계를 상상해본다.(70쪽)
우리는 저런 질문들에 그치지 않고, 일하거나 공부할 때 필요한 지원, 많은 사람과 의사소통할 때 필요한 지원 등을 고민해야 한다.(80쪽)
지원은 삶을 지탱하되 통제해서는 안 된다 통제가 개입하면 지원을 볼모가 된다. 지금처럼 장애인의 몸보다 의료적 기준과 예산•행정의 효율을 우선시하는 상황은 여전히 2019년에 시작된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가 '장애등급제 가짜 폐지'임을 보여준다.(81쪽)
그러나 나는 '이동'에서 편안함, 편리함, 유연함, 안전함과 같은 가치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가장 기초적인 이동의 문제를 해결할 때, 더 나은 이동을 고민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삶의 균형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86쪽)
국토횡단쯤 거뜬히 해내는 사람도 박카스를 먹어야 소화할 수 있는 업무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분명히 밝혀두는데, 그건 청춘이 아니고 철인이다. 말 같지도 않은 노동 강도는 많은 사람을 죽였고, 장애인들을 노동, 나아가 사회에서 소외시켰다.(98쪽)
기분은 불평등과 분리할 수 없다. 누군가는 너무 존중받아서, 누군가는 너무 무시당해서 기분이 쉽게 망가진다. 존중과 무시가 사람을 가린다면, 그 배경에는 보통 불평등이 있다.(103쪽)
누군가를 비난할 때 질병이나 장애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는 질병이나 장애를 나쁜 것으로만 이해하는 차별적인 사고방식을 답습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만일 그 단어를, 자신의 몸의 상태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설명하고 표현하기 위해 질병이나 장애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정치적이라면 그것의 의미를 두고 계속 여러 주장이 경합해야 한다. 정치적인 문제에서 답이 하나로 고정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바름'이 있다면 있지, '정치적 올바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 '올바름'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107쪽)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는 말은 보통 당장 앞의 사람이나 경험이 아닌 편견에 기대는 말이다. 그래서 그 편견이 입혀진 사람들은 자꾸 의도치 않게 상처받는다. 말을 조심할 때 핵심은 말 자체가 아니다. 말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말 뒤의 불평등한 사회와 내 앞의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 은유는 단지 글이나 생각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 신념,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110쪽)
앞서 살펴보았듯, 잘못된 은유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다. 이는 당장 앞에 있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에 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가 처한 현실에 관심이 없기에 바뀌어야 하는 현실을 가리기도 한다.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마음만이 아니라 몸을 다치고, 생존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누구도 해치지 않으려면,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를 꾸준히 되돌아보며 내가 무엇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내가 사용하는 문장 안에 어떤 사람들의 삶이 들어있는지 고민하고, 말의 방향을 정확히 맞출 필요가 있다.(115쪽)
접근성을 보장하려면 우리는 당사자들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함께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162쪽)
아픈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무조건의 보호가 아니라 상황과 몸에 맞는 적절한 지원이 필요할 뿐이다.(185쪽)
타인의 몸을 의심할 권리는 없다.(187쪽)
잘못이 아닌 무엇을 해명할 수는 없다. 몸에는 잘못이 없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라.
몸에 대한 해명은 없다.(203쪽)
질병은 문화적이다. 그래서 계속 그 규정과 대우를 두고 논쟁을 벌일 수 있으며, 따라서 질병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정치적이다. 질병과 함께하는 삶은 계급, 장애뿐 아니라, 성별, 인종, 나이 등 수많은 변수로 구성되어 있다.(210쪽)
'병사'라는 단어 하나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따위 얄팍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 질병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212쪽)
진짜 문제는 바이러스가 아니다. 치사율이 보여주듯 많은 경우에 코로나19는 사망으로 곧 이어지지 않는다. 바이러스의 전파와 감염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질병과 죽음에 협력하는 사회이다.(226쪽)
확진이 곧 사망이 아니라면, 무엇이 확진자를 죽게 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227쪽)
어느 환우는 정신 질환이 기저 질환으로 포함됨으로써, 기저 질환자는 어차피 죽는다는 잘못된 전제를 활용하여 정신장애인 폐쇄병동의 구조적 문제도 은폐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기저 질환을 기저 상태로 바꾸어 부름으로써 우리는 감염과 몸 사이의 관계, 나아가 필요한 지원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아픈 사람들이 어차피 죽을 사람이 아닌, 적절한 지원이 있다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사함들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비과학적이고, 참사를 개인화하며, 구조를 감추는 '기저 질환'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242쪽)
오직 건강만을 수호하는 세상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아픈 사람이 늘어나고, 바이러스가 더 자주 발생한 세상은 건강이 아닌 난치를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낫지 않는 아픈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만 모두가 생존할 수 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제물이 아니다. 우리는 치료되지 않는다. 건강의 대안은 난치이다.(243쪽)
핵심은 내 몸이 낫지 않더라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난치를 더 많은 이들의 삶의 조건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내가 나의 몸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와달지 않는 순간에는 나의 죽음이 타인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세상을 어쩔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비로소 나는 나의 몸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성가신 몽이지만, 적어도 이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내 몸의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256쪽)
그래서 우리는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약한 채로 살다가 편하게 죽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세상에 도달하는 방법은 난치의 상상력일 것이다.(268쪽)
아픈 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이 각자 공유하는 삶을 통해 줄거리를 구성하고, 그 이야기들이 세상에서 만나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로 통합될 수 있다면, 아픈 사람들의 언어, 질병 세계의 언어는 충부해질 것이다.(292~293쪽)
이야기하는 아픈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아픈 저자가 많아질수록, 아픈 이야기를 나누는 아픈 사람의 공동체도 넓어질 것이다. 아픈 이야기로 연결된 우리, 질병과 아픔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함께 숨 쉬는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294쪽)
끙끙 앓고만 있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없다. 칩거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못 나갈 거라면.(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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